2005/08/25 08:18

마늘 까는 기계를 파는 아저씨 Letters from me

친한 선배 형한테 오래 전에 들은 실화.
아마 1998년 10월께로 생각됨. 장소는 평촌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 때는 늦은 저녁


사람들은 눈을 감거나 신문을 보거나 멀뚱멀뚱 뜬 채로 흔들리는 전차에 지친 몸을 맡기고 있다.
이때 통로 쪽의 문이 열리며 한 아저씨 등장. 굉장히 쑥스러워 하다가 내가 앉아있는 노약자석쪽으로 온다.
사람이 적은 곳에서부터 시작해야겠다는 심산인 듯 많은 사람들을 등지고 세 사람 앞에 앉아서 요상하게 생긴 플라스틱 대롱을 꺼낸다.
목소리에 힘이 없다. 아무래도 초보인듯.
아저씨: 이, 이게 새, 새로 나온 마늘까는 기곈데… 신기하게도 비비기만 하면… 마늘 속껍데기가 싹 벗겨집니다. 자, 시범을 보이께요…

망사주머니에서 시범용으로 준비해둔 마늘을 한 쪽 꺼내서 대롱에 넣는다.
바닥에 대고 열심히 비비지만 관심두는 사람이 없다. 곁눈질로 힐끗 보는 나.

아저씨: (대롱을 세워 털며) 자 이렇게 하면 신기하게 알맹이만 쏙 나옵니다. (더욱 털며) 자… 자… (화를 내며) 왜 이렇게 안 나와 이거?

이 대목에선 아무리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호기심과 궁금증이 발동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반대편 사람들, 일어서서 아저씨의 등뒤로 고개를 내민다. 이때 마늘이 쏟아진다.

아저씨: 자 나왔습니다아. (표정이 바뀌며) 어?

원형 그대로 쏟아진 마늘. 갑자기 뒤에 서있던 사람들, 풋, 파하하, 하고 웃는다.
웃음소리에 고개를 돌리는 아저씨. 웃던 입을 다물고 다른 쪽을 바라보며 얼른 자리에 앉는 사람들.
아저씨의 고개가 돌아간 사이 웃는 나. 사람들, 뭐야? 뭐야? 하며 아저씨 쪽을 바라본다.
얼굴 빨개진 아저씨. 참지 못해 쿡쿡대는 사람들.

아저씨: (이마를 한 번 훔치며) 아 사실 이, 이게… 항상 되는 건 아닙니다. (황급히 마늘을 꺼내며) 다시 한 번 해보께요. 이번엔 잘 될겁니다.

사람들 모두 일어서서 아저씨한테 다가온다. 다시 바닥에 앉은 채 열심히 비비는 아저씨.
빙둘러 서서 구경하는 사람들. 잠시 멈추고 주위를 휘 둘러보는 아저씨.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 갑자기 신문을 보거나 옆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들. 터지려는 웃음들을 머금고 곁눈질로 보는 사람들. 이윽고 침묵이 흐르고 대롱을 조심스럽게 터는 아저씨.
그러나 아아… 또다시 그대로 쏟아지고야 마는 마늘 마늘… 사람들 모두 박장대소.
이때 문이 열리고 내리는 사람 없이 새로 타는 사람들.
무슨 영문인지 자못 궁금해하며 옆 사람에게 물어보지만 웃느라 대답할 정신없는 옆 사람.

아저씨: (혼잣말인 듯하나 다 들리는 목소리로) 아니 뭐 이래 이거?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침을 꿀꺽 삼키고) 아 여러분 사실은요, 마늘이 좋아야해요. 괜찮은 놈으로 다시 한 번 해보께요.

공들여 마늘을 고르고 난 아저씨. 다시 공들여 비비기 시작. 사람들 모두 초긴장. 침묵.
문이 열리는지 닫히는지, 지금이 어떤 역인지, 열차가 가는지 서는지 관심없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 이윽고 하얗게 나오는 마늘 마늘… 박수치며 환호하는 사람들.
옆 사람을 껴안고 기뻐하는 사람들. 하얀 마늘을 높이 들어 한 바퀴 휘 돌리는 아저씨.

아저씨: (득의 양양해서) 봐요. 잘 되죠? 여러분 중에 한 명이 해봐요. 잘 된다니까? 누구 지원자 없어요? 지원자 나와보세요.

자신의 반만한 애인의 지지에 힘입어 손들고 앞으로 나오는 덩치 큰 남자.
아저씨한테 검증받은 마늘을 대롱에 넣고 비비기 시작. 또다시 긴장하는 사람들.
이제 한 번 꺼내보라는 아저씨의 말에 비빔을 멈추는 덩치 커다란 남자. 긴장. 침묵. 그러나 아아…
작살이 나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마늘… 황당해진 아저씨.
와하하하 웃는 사람. 배를 움켜잡고 구르는 사람. 눈물을 닦는 사람. 옆 사람을 치는 사람.
머리를 긁적이며 무안해하는 덩치 큰 남자.

아저씨: (덩치 커다란 남자의 등짝을 때리며) 아 그렇게 쎄게 비비면 어떡해!

그 칸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 천 원짜리 마늘 까는 기구를 사고야 만다.
다음 칸으로 가기 전 허리를 반 접어 인사하며 고맙다고 연신 말하는 아저씨.
어느 새 화기 애애해진 열차 안.
IMF 시대에 이렇게 웃을 수 있기는 처음이라며 사람들은 모두 아저씨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내리면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 웃으며 안녕히 가세요 인사하는 사람들.
아직도 못다 웃은 웃음을 양 볼에 머금은 채로 집으로 걸어가는 나.
집에 와서 계속 킥킥대며 웃는 나.
이불 깔고 누워서 눈을 감고 자기 바로 전까지 웃음이 가시지 않는다.

덧글

  • 이민우 2005/08/26 12:33 # 답글

    : 이오공감 타고 들렀습니다. 글이 너무 재밌어요. 읽는 내내 저도 모르게 크게 웃었답니다. 그 아저씨, 상상만 해도 왠지 귀여우신걸요.(웃음)
  • 슈타인호프 2005/08/26 13:09 # 답글

    이오공감에서 보고 드어와습니다. 정말 잔잔하게 웃게 해주는 이야기네요^^
  • 블루 2005/08/26 14:10 # 답글

    하하 꼭 만나고 싶은 아저씨네요. ^^
  • 〃소녀별‥☆ 2005/08/26 15:18 # 답글

    와 아저씨... 비록 처음 의도는 그게 아니었을지라도?
    마음이 푸근해지는 아저씨네요.
    요즘은 지하철에서 그렇게 웃을일이 없죠...다 상인분들이 프로페셔널이되서;;;=ㅁ=;;
    웃음을 줬다는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아저씨!!'ㅅ'b
  • 윌리 2005/08/26 15:59 # 답글

    글을 읽으면서 상황이 떠올라 한참 웃었습니다. 하하.
    뭐랄까 기분좋으면서 따뜻한 글이네요. 작은 생활의 발견이랄까?
    마늘기계도 많이 파시고 세상도 그만큼 즐거워졌으면 좋겠네요!
  • 하드군 2005/08/26 19:26 # 답글

    잘 읽었습니다. 오랫만에 마음이 따듯해지는 이야기 읽었어요.:-)
  • 날라까기 2005/08/27 07:21 # 답글

    ㅋㅋㅋ 그 자리있었음 지대로 리얼코미디 봤겠는걸요...^^
    갑자기 인생은 아름다워의 로베르토 베니니가 생각나는
    이윤멀까?
  • 요공감 2005/08/27 10:53 # 삭제 답글

    베테랑 지하철 세일즈맨... 의 고도의 상술 ! 아니었을까요... 음... - - +
  • RocknCloud 2005/08/27 12:41 # 답글

    잘 읽었습니다.
    한참 웃었어요.
    공감등극 축하드립니다. ^^
  • leben 2005/08/30 06:59 # 답글

    엇.. 이오공감이 뭔지도 모르는데 어느 새 등록되었네요? 거의 혼자 조용히 포스팅 하고 있었는데.. ㅡ.ㅡ;
  • 승종 2006/03/20 06:26 # 삭제 답글

    혹시 모든것이 처음부터 의도된 것이 아니었을까...동정감을 유발시킨다-많이 판다....내가 왜이러쥐..
  • leben 2006/03/28 06:39 # 삭제 답글

    그런 생각 많이 합니다. 그냥 삐딱한 거죠. ㅋㅋ
  • 강동호 2009/03/25 01:15 # 삭제 답글

    안녕
  • leben 2009/03/25 13:53 #

    이거 뭐야 여기다 댓글 달면 못 볼 줄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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