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7/29 02:56

딜레마 IV Letters from me

순간을 스쳐 가는 모든 일들이 남긴 이 갈증 무엇으로 씻을까.
변하지 않는 모든 병폐 속에서 이젠 너무 많이 지쳐 버렸어.
아무리 모든 걸 이해하려 해봐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쓰라린 기억들 모두 잊어버리고 하루를 보낼 수만 있다면.

가르침 속에 깊은 뿌리가 없고 배운 것 어디에도 쓸 수가 없어.
짜여진 형식적인 모든 틀 속에 나를 맞추는 데 지쳐 버렸어.
아무리 누구를 탓하려 한다해도 이젠 의미가 없어.
미래를 기대하는 작은 마음으로 끝없이 노력해 보는 거야.
― 김경호의 Shout 중에서


∙사람은 잠을 자야한다.
4월 20일 밤 1시. 건물 밖은 서울역에서 집회를 마치고 모여든 지하철노조원들로 가득 차있고, 안에 있는 나는 2년 동안 정제해온 효소를 트립신으로 자른 후 그 조각들을 분리하는 중이다. 창문을 열고 내려다보니 모이를 줘도 될 정도로 옹기종기 머리만 보인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정겨운 소음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깨어 있는 사람들을 눈으로 확인하면 나도 깨어 있기가 쉽다는 것도 느낀다. 아침에 본 신문과 저녁 먹으며 본 뉴스는 4․19에 대한 이야기 대신 노조원들의 파업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있었음과, 빈 공간을 가득 메운 대자보 역시 정부의 일방적인 구조조정에 대한 부당성과 파업에 대한 정당성을 지지하는 글로 가득 차있었음을 기억해낸다. 올라오다가 보았던, 길가에 쌓인 돌멩이는 그렇게 정의된 부당성과 정당성이 만나 약간의 마찰을 일으켰음을 나타낸다는 것을 기억해낸다. 그리고 또 떠올린다. 오래 전 친구와 나누던 헛소리를.

“정치하는 사람들은 참 멍하고 청해. 시위를 하든, 집회를 하든, 가두행진을 하든, 그대로 놔두면 조용하게 일 치르고 알아서 해산할텐데, 안 그래도 불만 가득히 모인 사람들을 자꾸 건드려대니 불난 집에 선풍기 틀어대는 것과 뭐가 달라?”

“재미있으라고 그러는 거겠지. 솔직히 전경이 없으면 무슨 맛으로 데모하냐.”

새벽 3시. 노조원들이 1층에서 잠을 잔다. 난 열심히 살기 위해 나를 채찍질하고 잠을 이기기 위해 어딘가에서 잠을 자고있을 경쟁자를 떠올리기로 했으나, 노조원들만이 떠올라 졸리기만 하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지금 이 순간 나에게 필요한 건 잠뿐이라는 생각은 잠이 오면 가속되는 법. 책상에 수건을 깔고 엎어지기로 했다. 국가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잠자는 자에게 수건 한 장은 너무나 초라하다는 생각도 잠이 오면 가속되는 법.

아침 7시. 노조원들의 구호소리에 급작스럽게 잠을 양보했다. 또 다시 어딘가로 향해 가는 머리들. 그네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다음과 같은 우매한 삼단논법의 희생자가 아니길 기원해주는 것 뿐이었다: 군중은 우매하다. 무리지어 모인 사람들을 군중이라 한다. 노조원들도 무리지어 모였으므로 군중이다. 따라서 노조원들은 우매하다.

그들이 남기고 간, 일심단결로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대자보의 글귀가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세상이 그렇게 해서 바뀔 수 있는 성질의 것이던가? 수세기가 지나는 동안 있어왔던 수많은 시도들은, 이런 운동이 있었다, 라는 글 한 줄로 사회학 교과서에 갇혀버렸고, 이렇게 실패했다, 라는 글 한 줄로 역사 교과서에 갇혀버렸다. 그나마 성공한 혁명도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혁명을 필요로 한다. 세상이 변했다면 그런 실패들이 모여 변화로 보였을 뿐이다. 게다가 그런 세상에 쉽게 적응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라며 칭찬한다. 그런 세상에 잘 적응한 사람을 우리는 성공한 사람이라며 추켜세운다.

∙군중은 역시 우매하다.
세상은 내게 냉소를 안겨주었고 냉소는 내게서 수많은 종류의 사랑을 앗아가 버렸다.
사무엘 울만은 말한다. 열정과 이상을 잃지 않고 용기와 모험정신에 지배당하는 것이 청춘이며 냉소주의의 폭설과 비관주의의 얼음으로 덮히지 않으면 여든이라도 청춘이라고. 전문종교인들은 설파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내가 변하면 행복하고도 낙관적인 세상을 살 수 있다고. 솔로몬은 타이르고 꾸짖는다.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인생의 선배는 충고한다. 행동하지 못하는 지적속물주의에 빠지지 말라고. 찬양대는 노래한다. 오라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자고.

그러나 나에게 필요한 건 이미 청춘이 아니다. 남보다 지식을 많이 획득해서 돈 많이 벌고 싶은 게 열정이고, 그 열정을 이용해 남보다 위대해지고 싶은 게 이상이라면, 차라리 폭설과 얼음과 빈궁을 택하겠다. 나에게 필요한 건 기도와 은혜를 통해 내 눈이 가려지는 것보다, 불의한 세상이 바뀌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얼마나 수많은 전문종교인들이 세상의 학문과 편견의 시류에 편승하여 왜곡된 세상이 살만한 세상이라 말해왔던가. 세상은 똑같이 하나이지만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달라질 뿐이라는 저급한 인식론을 외치면서 순종과 헌신만을 강요해왔다. 나도 한때는 그들의 주장에 심히 공감하여 긍정적인 세상을 매우 의욕적으로 살았었다. 선의의 경쟁은 좋은 것이라는 근거 없는 정언명령을 맹목적으로 따르면서, 남보다 잘 살기 위해, 남을 지배하기 위해, 잠을 줄이고, 시간을 금처럼 아껴 쓰고, 체력을 단련해왔었다. 좋은 인간관계는 성공의 필수조건이란 점에서도 교회는 필요했다. 그러나 나의 성공을 위한 기도 속에 수많은 사람의 실패를 위한 나도 모르는 바람이 녹아있었다는 사실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그런 것을 나에게 숨겨왔던 교회야말로,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노래는 꾸준히 불러왔으나, 세상은커녕 조그마한 한국도 바꾸지 못한 채 지적속물주의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엄청난 자본과, 극단적인 자기 희생(犧牲)과 자기 회생(回生)이 모여있는 우리네 교회는, 그 열정과 헌신을 사회로 흘려 보내 온갖 부덕과 불의를 분연히 내쳐버리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어느 제도적 교육보다도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실천지침과 금지규범만을 주입하여, 다양성을 잘라내고, 믿음이야 어찌되었든 거지옷 입은 사람의 출입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는 것이다. 내 열정의 투자장이요, 내 봉사의 실천장이던 한국교회여, 언제쯤 천민자본주의의 튀기들과 결별하고, 유보된 계몽과 성숙을 섭취하려는가. 언제쯤 유치한 삼단논법의 희생자에서 탈피하여 변화와 개혁의 주체세력으로 자라려는가.

∙본질은 항상 왜곡된다.
무엇 때문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아주 오래 전, 데모하던 날, 조용하게 진행되던 무리의 행렬이 갑작스런 최루탄에 흐트러지고, 백골단에 쫓기던 날, 무섭도록 전염적인 감정의 공유된 팽창을 난 기억한다. 억압은 그 종류를 막론하고 무리의 단결력을 강화시키며 육체의 고통은 무리의 친밀감을 고조시킨다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진화론의 순리대로,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고픈 욕구는 살아야 한다는 욕구로 좁혀졌고, 바꾸고 싶고 없애고 싶은 세상의 부정이 바로 앞의 전투경찰로 축소되었을 때, 난 더 이상 그곳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얼마 전, 세상이 어떻게 생겨 처먹었든지 간에 그 속에서 자식들을 소위 성공한, 또는 성공적으로 적응한 사람으로 만들기 간절히 원하는 한 아주머니―공교롭게도 독실한 크리스찬이자 초등학교 교사인―와, 몸이 사는 최소한의 수단을 확보해야 한다는 현실의 벽을 절감한 나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수학공식과 영어문법을 가르치기로 했던 첫 날, 고교 1년생에게 물었다. 왜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왜 내가 여기 있어야 할 정도로 너의 어머니는 널 공부시키려 하신다고 생각하니. 나중에 남보다 더 잘 살려구요.

일초도 머뭇거리지 않고 나오는 대답에 놀라기 전 나의 가슴은 이미 먹먹해졌다. 배움의 목적이 그런 건 아니리라는, 절망으로 먹칠된 내 말은 느릿느릿 한 시간 가량 지속되었고, 다음 날, 학원에 나가게 되었으니 오실 필요 없어요, 라는 대답만을 듣게 되었다.

내가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연구실. 연구의 목적은 질병치료법의 개발과 생화학 기술의 발달에 따른 인간고통의 감소에 있지 않고, 그 속에서 자신의 기여도를 높여 명예와 이에 따르는 부를 남보다 먼저 획득하는 데 있다. 좋은 논문 남보다 빨리 많이 써서 유능한 교수와 연구원으로 인정받고, 졸업해서 돈 많이 주는 좋은 직장과, 어렵사리 딴 학위를 존경으로 바라보는 콤플렉스 가득 찬 시선을 보장받기 위한 열정들. 교수와 상급자들은 그나마 그런 열정이라도 없다고 성화다. 그래놓고 연구비 신청서와 연구 논문엔 언제나 장황하게 다른 사람이 받는 혜택에 대해서만 채워 넣는다. ad nauseum.

노벨상이 꿈이 아닌 아이가 거의 없고, 대통령이 되는 게 장래 희망이 아닌 아이가 거의 없지만, 어른은 누구 하나 이유를 묻지 않는다. ‘노벨과 개미’라는 학습지는 ‘열심히 개미처럼 공부해서 노벨상을 탈거야.’ 라는 기가 막히는 노래로 광고를 해대고, 고등학교의 진학 상담교사는 소질과 적성이 무엇이든 명문대로 가는 길만이 대통령이 되는 지름길이라고 속삭인다. 나도 한때는 그것이 하나님도 함께 하시는 정상적인 길이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힘든 세상에서 살아남기 힘들기에 생존을 위해서라도 따라야 한다는 철든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나의 두뇌를 이성의 질풍노도에 내던지고, 몸을 성공과 행복의 그물에서 떼어내자 찾아온 한참 동안의 지독한 공백은, 배움에 대한 새로운 이유를 찾도록 나를 몰아세웠다.

나보다 배우지 못한 이를 위한 배움. 내가 더 잘 보기 원함은 나보다 잘 보지 못하는 사람을 위함이요, 내가 더 잘 듣기 원함은 나보다 잘 듣지 못하는 사람을 위함이요, 나에게 정확한 발음과, 바른 소리를 낼 수 있는 혀가 있다면, 그것은 말하지 못하는 사람을 위함이리라. 그러나 우리의 교육과 배움은 꿈과 열정과 이상이란 단어의 뜻마저도 왜곡시키고 있다.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란 지식의 우등생들이 판사와 검사와 변호사가 되어, 법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기를 바란다면, 지나가던 개도 웃을 것이다. 그런 기도로 성공한 기업가들이 이윤을 사회에 재분배하길 바란다면, 그런 환경에 잘 적응하여 성공한 전문지식가들이 사랑으로 지식을 사용하길 바란다면, 정치인이 사람이 되길 바라는 것과도 같다.
본질을 언제나 왜곡시키는 인간에게 먹혀 변질되어 나온 똥들은 얼마든지 많다. 부활절엔 계란이 넘쳐나고, 크리스마스엔 산타클로즈와 루돌프가 온 세계를 뒤집고 다닌다. 교회의 십일조나 각종 헌금은, 그렇게 해야만 일곱 배씩 일흔 배로 돌려 받는다는 위대한 믿음이 아니면 하기 힘들고, 교회는 영생 천국을 담보로, 부피를 확장할 때마다 진 빚을 갚기 위해 성도들의 위대한 믿음을 부추긴다.

너나 할 것 없이 이스트팩 가방을 메는 학생들과, 머리를 색색으로 물들이는 젊은이들에 의해, 개성의 의미는 ‘남이 하는 대로 따라 하는’ 유행으로 바뀌었고, 다른 사람의 정의에 충실한 한국 사람들은 미국 사람들이 예쁘다고 하는 대로 화장하기에 바쁘고, 멋있다고 하는 대로 몸 만들기에 바쁘다.

∙인간의 한 연구
안치환은 노래한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박노해는 읊조린다. 사람만이 희망이라고. 기독교는 말한다. 온 세상을 지배하도록 창조된 인간은 짐승과 차원이 달라 감히 비교할 수 없노라고. 그러나 요즘엔 부쩍 꽃이 사람보다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동물의 왕국이 인간의 왕국보다 여러 차원 아름답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꽃은 자기가 핀다 해서 다른 꽃을 시기하지 않는다. 동물은 적어도, 자기 맘에 들지 않는다고 총기를 난사하거나, 스텔스기를 보내 미사일을 폭격해대진 않는다. 동물은 색맹이니 적어도 색깔이 다르다고 억압하지도 않는다. 동물은 생화학을 안 배웠으니 적어도 독가스나 세균을 살포해서 동료를 해하진 않는다. 한층 양보해서 동물과 인간이 비슷하다면, 개가 오줌으로 자기 영토를 표시하듯이, 인간 중에서도 특히 한국인은 좁아 터진 영역을 나누고 또 나누어 자기 지역을 표시하는 기술과 거기에 감정까지 이입하는 비상한 능력이 있다. 힘 센 개가 따뜻한 개밥을 먹듯이 인간도 힘이 세면 남의 밥까지 뺏어 먹는다. 힘이 없으면 머리를 굴려서라도 남의 밥을 자기 밥으로 만든다. 게다가, 죽을 때 가져갈 것도 아니면서 창고에 가득히 쌓아두고는 자신의 부지런함과 뛰어남을 자랑하는 모습으로 보면 따뜻한 햇볕에 배 드러내고 낮잠 자는 개나 고양이가 한참이나 위대해진다.

뮬란은 말한다. 유전자의 표현형 대로, 생긴 대로 살라고. 국민교육헌장은 말한다.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여 민족중흥과 인류공영에 이바지하라고. 그러나 이미 98.5%가 침팬지와 동일한 인간의 유전자는, 그나마 이성과 사랑과 숭고의 정신을 가능케 한, 나머지 1.5%의 유전자를, 도시가 농촌을 그러하듯, 잠식해 가는 중이다. 알바니아가 세르비아에게 박해당하고, 유고연방이 나토와 미국에게 폭격당하는 지금, 생겨 먹은 대로 살아서 칭찬받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궁금하다. 타고난 저마다의 적성과 소질의 계발이 수학공식과 영어문법의 빠른 습득과 같은 말이고, 민족의 중흥이, 박세리가 미국에 귀화하지 않는 것이고, 박찬호가 20승을 꼭 거두어야 하는 것이라면,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길은 멀기만 할뿐이다.

K대학의 교수는 강연한다. 인생은 목표가 있어야 하고 꿈이 있어야 한다면서, 사람은 왜 사는지를 알아 나라와 민족과 인류에게 공헌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자기는 그래서 인생의 목표 삼기를 ‘모든 국민이 인생의 참다운 의미를 알아 목표를 향해 부단히 노력할 수 있도록 깨우치는 삶’이라 했다. 왜 사냐는 질문에 왜 사는지 알기 위해서라는 대답보다 우스운 목표다. 한 인간의 삶의 이유와 목표가, 존재의 가치가, 나라를 위해, 인류를 위해 살면 완성되는, 그런 간단한 것이던가? 항상 동가의 의미를 지니는 죽음 앞에서 삶만을 가정하고 삶만을 계획하고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죽음에 대한 예의?

이제 나는 잘 모르겠다. 모든 것을 알았으니 죽는 길밖에 없다며 철없는 생각을 하던 시절이 오히려 그립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하는 이유도, 잠을 줄이고, 시간을 금처럼 아껴야 하는 이유도, 심지어 금이 왜 아껴야 하는 물건인지도, 난 모르겠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상투적인 부작용 속에서, 신자유주의와 중도보수주의의 말장난 속에서, 난 어디로 가고 있는가.

∙버스, 마을버스, 지하철, 경찰차
4월 25일 일요일 오후. 학교의 정문은 수많은 사람들의 눈길과 퀴퀴한 최루액 속에서 불타고 있었다. 소방용 경찰차는 물을 뿌려댔고, 전투경찰들은 전진과 후퇴를 반복했다. 급작스레 팽창된 감정을 공유한 사람들은 구경하던 도중, 폭력경찰 물러가라, 지하철 파업 정당하다, 를 외쳐댔고, 하늘에선 헬기가, 조용히 복귀하면 고용안정 보장한다는 방송을 해대고 있었다. 그리고 교내로 들어갈 길이 없어 보이는 그 속에서 난, 저온실에서 죽어가고 있을 효소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카메라맨들 사이로 우여곡절 끝에 안으로 들어온 나는, 마스크를 쓰고 계단 밑에 주욱 앉아서 화염병을 만들고 있는 학생들 옆을 지나고, 계단 위에 주욱 앉아, 저런 것도 경찰이냐, 개새○들 물러가라, 는 여학생의 구호를 정확히 네 번씩 따라하는 학생들 사이를 지나, 정확히 6일 전과 같은 모습으로 모여있는 서울지하철공사 노조원들의 사이를 비집고, 그 와중에 담배 불 좀 빌려달라는 부탁에 어깨 한 번 으쓱 해준 뒤에, 실험실 문을 열고 들어가 효소를 안정화시키는 에틸렌글라이콜을 먹여주었다. 지하철 안에서 아침에 만났던, 다리가 없는 할머니의 쉰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듯, 가슴이 아파왔다. 갑자기 울컥하는 마음에, 효소를 하수구에 쏟아 버리려다가, 평소에 난 이성적이었다는 생각에, 가만히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그리고 집에서 쓸 시간이 없어 가져다 놨던 일기장을 급히 뽑아 몇 달 전 써내려갔던 내 자위와 다짐을 읽고 또 읽어야 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급진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점진적인 것이다. 그러나 전자는 변화 후의 세계에 필요한 안정성을 보장받지 못하며, 심각할 정도로 체계가 엉성해질 가능성이 많은 반면, 후자는 많은 인내를 거쳐 완성되는 것인 만큼, 보다 안정적이고 탄탄한 체계를 갖출 수있다. 따라서 난 점진적인 변화를 지지할 것이며, 급진적인 변화는 변덕의 차원으로 여겨 대부분 지양할 것이다. 예를 들어, 학교의 등록금이 오르면, 올리지 말라며 수업거부로 투쟁할 수도 있지만, 수업료가 그렇게 아깝다면, 수업에 보다 충실히 참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전철 안의 앵벌이들과 불구자들을 불러모아, 옷 입히고, 밥 먹이고, 잠 재워 줄 수도 있지만, 그런 소외자들이 더 이상 생기지 않도록 지혜와 힘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애쓰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속한 삶의 자리에서 사회가 내게 요구하고 내가 사회에 돌려줄 일을 충실히 해낼 때에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세상은 변해갈 수 있다는 믿음 속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삶을 살아내는 것이 왕국을 세우지 않고 십자가의 죽음을 택한 예수의 삶과도 일치하는 것이라는 믿음 속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런 믿음이 내게 필요하다. 곳곳에 보이는 수많은 왜곡과 불의를 바로잡으려면, 나부터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러면 세상은 나의 때가 아니더라도 변화할 것이다. 그런 믿음이 내게 필요하다.”

밤 11시. 집으로 향하는 길에 함께 나란히 걷게된 학생들은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쇠파이프를 손에 든 채 무리지어 교문으로 향하면서, 지하철 파업 사수하여 더러운 세상 바꿔보자, 를 외쳐댔다. 내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라곤 우매한 삼단논법의 희생자가 되지 않도록 간절히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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